SN 12.15 · 깟짜나곳따 경
1. 사왓티 근처에 머무실 때였다. … 그때 깟짜나곳따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다가가 절을 올리고 한쪽에 앉았다. 한쪽에 앉아서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바른 견해, 바른 견해’라고 합니다. 어느 정도에 이르러야 바른 견해가 있는 것입니까?”
2. “깟짜나여, 대체로 이 세상은 [주 1] 존재와 비존재라는 두 가지 극단에 의지한다〔그것들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세상의 발생을 [주 2]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사람에게는 세상에 대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사람에게는 세상에 대해 ‘존재한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주 3]
3. 깟짜나여, 대체로 이 세상은 매임과 집착〔자양분을 취함〕과 편향에 속박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이 매임과 집착, 알아차림의 고착, 편향, 잠재적 성향에 관여하거나 매달리지 않으며, ‘나의 자아’라고 마음을 정하지도 않는다.
그는 일어날 때에는 오직 괴로움이 일어나고, 사라질 때에는 괴로움이 사라질 뿐이라는 데에 불확실함이나 의심이 없다. [주 4] 이에 대한 그의 앎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깟짜나여, 이 정도에 이르면 바른 견해가 있는 것이다.
4.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두 번째 극단이다. [주 5] 여래는 이 두 극단을 피하여 중도로 법을 가르친다.
5.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 작용이 있다. 형성 작용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다. 의식을 조건으로 정신과 물질이 있다. 정신과 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처가 있다. 여섯 감각처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있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있다.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마음의 괴로움, 절망이 일어난다. 이처럼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발생한다.
6. 이제 바로 그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고 소멸하면 형성 작용이 소멸한다. 형성 작용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한다. 의식이 소멸하면 정신과 물질이 소멸한다. 정신과 물질이 소멸하면 여섯 감각처가 소멸한다. 여섯 감각처가 소멸하면 감각접촉이 소멸한다. 감각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한다.
느낌이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한다.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한다.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한다.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한다.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마음의 괴로움, 절망이 모두 소멸한다. 이처럼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한다.”
영어판 번역자의 머리말
이 경은 사성제를 넘어서는 것으로 보이는 한 수준의 바른 견해를 논한다. 이는 수행의 길이 완전히 계발되고 제 역할을 마쳐 이제 내려놓아야 하는 수행 단계에 적용된다. 사성제에는 서로 다른 네 가지 과제가 따르지만, 이 수준의 바른 견해는 모든 일어남과 사라짐을, 수행의 길 자체의 일어남과 사라짐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모두 괴로움으로 본다. 따라서 여기에는 탐욕이 빛바래는 데 이를 때까지 철저히 이해한다는 하나의 과제만이 따른다.
이렇게 하여 형성된 모든 법을 내려놓고 열반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다. 이 수준의 바른 견해를 논하는 다른 경으로는 AN 7.58, AN 10.93, Ud 1.10이 있다.
영어판 번역자의 주석
주 1 여기서 “세상”이 뜻하는 바에 대해서는 SN 35.82를 참고한다.
주 2 SN 22.5에서 보여 주듯이 “발생”은 단순히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들이 일어나는 원인을 뜻한다. SN 56.11도 참고한다.
주 3 이 경의 진술과 SN 22.94의 다음 진술 사이에는 겉보기에 불일치가 있다.
“무상하고 괴로우며 변하기 마련인 물질을 세상의 지혜로운 이들은 존재한다고 인정하며, 나 또한 ‘그것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무상한 느낌도 … 인식도 … 형성 작용도 … 무상하고 괴로우며 변하기 마련인 의식도 세상의 지혜로운 이들은 존재한다고 인정하며, 나 또한 ‘그것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 경이 감각 자료의 발생이나 소멸에 주의를 모으는 사람의 마음 상태를 묘사한다는 점에 주목하면, 이러한 겉보기의 불일치는 해소될 수 있다. 그런 마음 상태에서는 그 감각 자료에 대해 존재나 비존재라는 생각을 일으킬 만한 것을 그 인식 방식 안에서 보지 못할 것이다.
반면 부처님께서 SN 22.94에서 묘사하시는 것처럼, 세상에 나타나거나 나타나지 않는 것들을 사람들이 논의할 때에는 “존재한다”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것이다.
다시 말해 이 경과 SN 22.94는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때 어떤 종류의 개념이 마음에 떠오르거나 떠오르지 않는지를 묘사할 뿐이다.
주 4 SN 5.10을 참고한다.
주 5 SN 12.48을 참고한다. 여기서 “모든 것”〔또는 일체, sabba〕이 뜻하는 바에 대해서는 SN 35.23을 참고한다.
번역 참고
작업 원문과 대조 자료 작업 원문은 Ṭhānissaro Bhikkhu의 영어 번역 To Kaccāna Gotta, SN 12.15입니다. 제공된 『상윳따 니까야』 제2권 「깟짜나곳따 경」 S12:15, 138–144쪽 사진 네 장에서 이 경의 시작과 마지막 본문을 확인하고 뜻과 용어를 대조했습니다. 138쪽 위의 앞 경 본문은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144쪽에서 한국어판 주석 108은 이어지지만, 경전 본문의 마지막 문장은 확인됩니다.
경명과 인명 영어판의 팔리어 경명 Kaccānagotta Sutta와 한국어 참고 자료에 따라 깟짜나곳따 경으로 표기했습니다. 도입의 인명은 깟짜나곳따, 부처님의 호칭은 영어판의 Kaccāna에 따라 깟짜나로 옮겼습니다. 1–6의 문단 번호는 읽기와 검토를 위해 새로 붙였습니다.
바른 견해와 두 극단 right view는 바른 견해로 옮겼으며 정견을 뜻합니다. existence와 non-existence는 존재와 비존재로, “everything exists”와 “everything does not exist”는 모든 것이 존재한다와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구분했습니다. 이를 단순한 낙관이나 비관의 문제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의지한다” 뒤의 “그것들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영어판의 대괄호 속 보충 표현입니다.
발생과 소멸을 보는 지혜 origination은 앞선 번역과 같이 발생으로 옮기되, 영어 번역자의 주 2에서 이것이 단순한 일어남뿐 아니라 그 원인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right discernment는 바른 지혜로 옮겼습니다. 존재나 비존재에 관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문장을 영어판에 따라 유지했습니다.
매임과 집착과 마음의 고착 attachments, clingings, fixations of awareness, biases, obsessions의 나열을 구분하여 매임, 집착, 알아차림의 고착, 편향, 잠재적 성향으로 옮겼습니다. “나의 자아”라고 마음을 정하지 않는다는 구절과, 괴로움의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한 앎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다는 구절을 모두 실었습니다.
연기의 용어 fabrications는 형성 작용, consciousness는 의식, name-and-form은 정신과 물질, six sense media는 여섯 감각처, contact는 감각접촉, feeling은 느낌, craving은 갈애, clinging은 집착, becoming은 존재로 옮겼습니다. SN 12.2, SN 12.12, SN 12.44와 해당 용어를 맞추었습니다. upādāna의 자양분을 취함이라는 다른 의미는 영어판에 따라 대괄호 속 보충과 이 번역 참고에 표시했습니다. 존재와 비존재를 논할 때의 existence와 연기 고리의 becoming은 영어 원문의 서로 다른 말입니다.
영어 번역자의 해설 영어판 머리말과 주석 다섯 개를 모두 한국어로 옮겨 본문과 분리했습니다. 사성제를 넘어서는 수준의 정견이나 수행의 길 자체를 내려놓는 단계에 관한 설명은 영어 번역자의 해석이며, 원문의 apparently에 해당하는 “보이는” 표현을 유지했습니다. 이 설명을 부처님의 직접 말씀이나 NBEF의 추가 설명으로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어판 주석의 해설도 경전 본문에 덧붙이지 않았습니다.